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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기록합니다. 글귀나 대사 등등….

하데스2021.04.19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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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은 것은 산 것보다 많아서 그의 왕국은 어느 왕국보다 거대합니다.

 

 - 교양 시간에 교수님께서 보여주신 무슨 애니메이션인데 뭔지 모르겠음….

 

 상상의 악은 낭만적이며 다양하지만, 실제의 악은 음산하며 단조롭고 삭막하며 지루하다. 상상의 선은 지루하지만, 실제의 선은 항상 새롭고 경탄할 만한 것이어서 사람을 도취시킨다.

 

 절실함이 지나치면 때로는 기억 자체가 왜곡된다. 자신의 애틋함에만 포획되어 세상의 이치를 파악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 기억하고 싶은 요소만 기억하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요소들은 걸러 낸다. 이 왜곡을 통해 파악된 세상 이치는 그 당사자 이외의 사람들로부터는 공감을 획득하지 못한다. 이와 달리 각자의 절실함이 공통감각 속에서 서로 만나기 위해 우리는 자칫 왜곡되기 쉬운 기억이 아니라 세속의 리얼리티와 마주하는 다소 고통스러운 순간이 필요하다.

 

 좋은 삶을 기대하는 유토피아적 희망은 삶의 무시무시한 리얼리티와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먹고 자란다. 듣기 좋은 말은 때로는 거짓이다. 몸에 좋은 약은 불가피하게 쓴 맛을 지닐 수도 있다. 아름답게만 보이는 세상도 사실은 환영일 수 있다. 세상은 분명 아름답지만 언제나 세상이 아름답지는 않다. 세상은 아름다운 만큼이나 추하고, 사람들은 선한 만큼이나 악하다.

 

 나는 홀린 듯이 싱크대로 달려갔다. 플라스틱 대야에 넘치도록 물을 받았다. 내 잰 걸음에 맞추어 흔들리는 물을 왈칵왈칵 거실바닥에 쏟으며 베란다로 돌아왔다. 그것을 아내의 가슴에 끼얹은 순간, 그녀의 몸이 거대한 식물의 잎사귀처럼 파들거리며 살아났다. 다시 한 번 물을 받아와 아내의 머리에 끼얹었다. 춤추듯이 아내의 머리카락이 솟구쳐 올라왔다. 아내의 번득이는 초록빛 몸이 내 물세례 속에서 청신하게 피어나는 것을 보며 나는 체머리를 떨었다.

 내 아내가 저만큼 아름다웠던 적은 없었다.

 

 1

 301호에 사는 여자. 그녀는 요리사다. 아침마다 그녀의 주방은 슈퍼마켓에서 배달된 과일과 채소 또는 육류와 생선으로 가득 찬다. 그녀는 그것들을 굽거나 삶는다. 그녀는 외롭고, 포만한 위장만이 그녀의 외로움을 잠시 잠시 잊게 해준다. 하므로 그녀는 쉬지 않고 요리를 하거나 쉴 새 없이 먹어대는데, 보통은 그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한다. 오늘은 무슨 요리를 해먹을까? 그녀의 책장은 각종 요리사전으로 가득하고, 외로움은 늘 새로운 요리를 탐닉하게 한다. 언제나 그녀의 주방은 뭉실뭉실 연기를 내뿜고, 그녀는 방금 자신이 실험한 요리에다 멋진 이름을 지어 붙인다. 그리고 그것을 쟁반에 덜어 302호의 여자에게 끊임없이 갖다 준다.

 

 2

 302호에 사는 여자. 그녀는 방금 301호가 건네준 음식을 비닐봉지에 싸서 버리거나 냉장고 속에서 딱딱하게 굳도록 버려둔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먹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녀는 외롭고, 숨이 끊어질 듯한 허기만이 그녀의 외로움을 약간 상쇄시켜주는 것 같다. 어떡하면 한 모금의 물마저 단식할 수 있을까? 그녀의 서가는 단식에 대한 연구서와 체험기로 가득하고, 그녀는 방바닥에 탈진한 채 드러누워 자신의 외로움에 대하여 쓰기를 즐긴다. 한 번도 채택되지 않을 원고들을 끊임없이 문예지와 신문에 투고한다.

 

 3

 어느 날, 세상 요리를 모두 맛본 301호의 외로움은 인육에게까지 미친다. 그래서 바싹 마른 302호를 잡아 스플레를 해먹는다. 물론 외로움에 지친 302호는 쾌히 301호의 재료가 된다. 그래서 두 사람의 외로움이 모두 끝난 것일까? 아직도 301호는 외롭다 그러므로 301호의 피와 살이 된 302호도 여전히 외롭다.

 

 나는 항상 내가 실수를 저지른 사람에게 적의를 품는다. 그들은 내 약점의 목격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섯 살 어린 내 동생이 먼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아둔패기로 여겼던 애가 필즈 메달을 따왔을 때, 손쉽게 거두는 동생의 성취를 지켜보기만 할 때, 나는 내 자신의 무능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렇게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재능이라니. 다른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재능 같은 건 왜 존재하는 것일까? 자신의 우수성을 뽐내기 위해 타인을 배경처럼 만들어버리는 재능 말이다.

 

 모든 과정이 마무리되고 그들 모두가 나른하면서도 어딘가 후련한 듯한 얼굴로 납골당을 떠날 때까지 그는 남아 있었다. 말하지 못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누어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한 조각만.

 뼈를.

 장의 뼈를.

 

 여기인가? 아니, 저기. 조금 더. 어디? 저기. 바로 저기.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바로 저기. 문장이 끝나는 곳에서 나타나는 모든 꿈들의 케른,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할 바가 없는 수정의 니르바나, 이로써 모든 여행이 끝나는 세계의 끝.

 

 "나는 오늘 육천 명을 태워 죽였어."

 

 "손 한 번 놀려서 그렇게 했어. 용인의 예민함 따위 도깨비나 줘버리라지. 평원 저편의 풀잎 위로 이슬 한 방울이 구르는 것까지 깨달을 수 있는 예민함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저들은 정말 모르는 걸까? 아니면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걸까? 제기랄! 이 예민함이라는 것이 칼로 도려낼 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그게 뼛속에 있는 것이라도 주저 없이 도려내었을 거야. 나는 알고 있어. 그게 6,217명이라는 것을!"